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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알뜰신잡’으로 친숙한 건축가 유현준 -
의식주에서 의복이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 음식이 뼈와 살을 구성하는 원소라면 주거지는 개인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친다. 의복이나 음식처럼 취향을 수시로 반영하기 어렵다는 면에서 소리 없이 강한 항목이기도 하다. 어디에서 태어나서, 어디에서 살았으며, 현재 생활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살피면, 한 사람의 삶의 궤적이 나온다. 그 옛날 ‘가정환경조사서’에서 사는 곳의 위치와 주거의 형태를 적으라는 거친 방식을 사용했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한편 그런 조사가 가능했던 이유 역시 공간이 가진 특성 때문일 수 있다. 학교라는 일률적인 공간은 학생들도 일률적인 기준으로 재단하기 쉬운 환경이다.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이들은 획일적인 사고를 하고, 비슷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도록 키워진다. 건축가의 시선으로는 우리나라 국민이 다양성을 인정하기 어려운 성향을 띠는 데는 학교 건축이 큰 역할을 한다는 분석을 하게 된다. 천장은 낮고, 광장은 좁은 이런 공간에서 12년을 생활하고 나면 전체주의적인 사고를 갖기 쉽다는 말이다.
방송 ‘알뜰신잡’으로 친숙한 건축가 유현준.(사진=C영상미디어) |
▶건축가의 시선으로 본 도시
tvN ‘알쓸신잡’ 시즌 2에서 건축가의 시선으로 본 세계의 풍경을 들려준 유현준 홍익대 건축대학 교수가 최근 <어디서 살 것인가>라는 책을 냈다. 그는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통섭의 관점을 보여주었는데, 그런 종횡무진 도시 관찰법은 책에서도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낸다. 건축가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도, 힙합을 들으면서도 건축을 그리고 도시를 생각한다. 도시가 그 시대의 거울이라면, 건축은 그 시대의 열매다.
“건축물의 진정한 의미는 건축물이 사람과 맺는 관계 속에서 완성됩니다. 건축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도시를 보면서 보이지 않는 룰을 발견하려는 습관이 있습니다. 보이는 건물만큼이나 보이지 않는 관계가 건축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생각하거든요.”
자동차를 생각해도 그렇다. 유현준 교수의 말처럼 “자동차를 살 때는 디자인과 성능이 중요한 것 같지만, 정작 중요한 건 그 자동차를 누구와 함께 타고 어디를 가느냐”다. 새 자동차의 좌석은 지금 비어 있지만, 미래에는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같은 공간을 봐도 누군가는 채워진 곳을, 누군가는 비워진 곳을 본다. 유현준 교수는 후자다. 그 빈 여백을 보면서 도시를 흐르고 있는 공기를 읽는다.
“건축의 형태는 그 너머의 삶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사회가 삭막한 이유는 도시의 중간지대인 사이 공간이 없어서라고 생각해요.”
그가 생각하기에 한국이 급속한 발전을 이룬 데에는 ‘서울 집중’ 현상의 영향이 있었다. 사람들이 서울로 밀려들면서 서로 다른 지역 사람들이 모여 교류하기 시작했고, 이 다양하고 우연한 만남들이 발전의 시너지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주민의 도시’였던 서울은 곧 아파트 운집 도시로 변모했다. 아파트는 더 이상 다양하고 우연한 만남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이웃들 간의 눈인사도 쉽지 않은 곳에서 교류나 소통은 요원한 일이다.
“현재 한국의 도시는 서울을 붙여넣기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저는 세종시가 새로운 도시의 모델이 되지 못한 데에는 서울을 그대로 복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가 항상 옳지는 않거든요. 앞으로 만들어질 도시는 오래된 것과 새것이 공존하는 모습이 되기를 바라요.”
그렇다고 모든 공간이 다 ‘공유’돼야 하는 건 아니다. 개인에게는 사적인 공간도 필요하다. 힙합 하는 젊은이들이 후드티를 입고 헤드폰을 쓰는 이유도, 유현준 교수가 가끔 자동차를 타고 나가 음악을 듣는 이유도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잘된 건축이란 함께 있으면서 홀로 있을 수 있는, 융통성 있는 공간이다.
“강남의 거리는 걷다 보면 재미가 없어요. 테헤란로를 보면 건물들은 획일적이고 도로는 너무 넓죠. 하지만 북촌이나 홍대, 명동은 걷는 재미가 있어요. 풍경이 달라지니까요. 저는 그 이유가 ‘골목길’에 있다고 봐요. 자연 발생적인 이 길들은 걸어도 피곤하지 않고 흥미롭죠.”
그가 ‘골목길’을 강조하는 이유는, 도시가 자동차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점점 더 찾기 어려운 공간이 돼가서다. 그의 지적대로 골목길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가 정주하는 공간이 됐다. 유현준 교수는 서울을 ‘보톡스 도시’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600년 역사에 비해 너무 어려 보여서다. 그 전통과 역사가 보이는 게 아니라 주름 없이 팽팽한 신사옥만 보인다. 이 건물들 사이로 흐르는 도로 역시 매끈하다.
tvN 프로그램 '알쓸신잡 2' 방송 화면.(사진=tvN)" |
▶현명한 자는 다리를 놓고 어리석은 자는 벽을 쌓는다
“광화문의 ‘피맛골’을 생각해보면, 쉬워요. 오래된 건물을 새 건물로 교체한 것 같지만, 사람들이 잃어버린 건 사실 그 골목길이거든요. 골목길에 쌓여 있던 추억과 정취를 잃어버린 거예요. 같은 식당이 건물만 바꾸어 문을 열어도 어쩐지 그 맛이 안 나죠. 그런 길은 한번 없어지면 다시는 되찾을 수 없어요. 안타까운 일이죠.”
미국의 경우 건물은 고치거나 바꿀 수 있어도 도로는 함부로 바꿀 수 없다. 유현준 교수는 리처드 마이어 뉴욕 사무소와 MIT 건축 사무소에서 근무한 바 있다. 뉴욕의 센트럴파크는 직사각형의 공원 부지 사방으로 수많은 골목길이 연결된다. 도심 속 프로그램과 유기적인 연계가 가능하다. 센트럴파크를 중심에서 5번가로 나오면 구겐하임 미술관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연결된다. 옛길과 새 건물이 공존하는 형태다.
“옛것이라고 다 지켜야 하고 새것은 다 나쁘다는 말은 아니에요. 어떤 것을 지키고 어떤 것을 바꿀 것인가에 대한 세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제가 느끼기에 한국의 건축에는 ‘디테일’이 부족해요. 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이분법 말고도, 어떻게 어디만큼 언제까지 바꿀 것인가를 논의할 수 있다고 봐요. 그런 생각들이 다양하게 교환될 수 있는 게 성숙한 사회라고 생각하고요.”
앞으로 그가 하고 싶은 건축도 다르지 않다. 지역과 지역 간의 소통을 일으키고, 걷다 보면 걷고 싶어지는 도시의 모습을 꿈꾼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화목한 건축’이다.
“보존과 개발의 이분법이 아니라 융통성 있고 유연한 분위기가 생기기를 바랍니다. 그런 도시 안에서 우연한 만남과 창의적인 사고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결국 ‘어디서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어떻게 살 것인가’와 맞물린다. 유연한 DNA는 창의적인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은 다시 화목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낸다. 그의 책이 ‘우리를 화목하게 만드는 도시를 함께 만들어보자’는 제안으로 마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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