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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네이버(진회 부부상))
요즘 국제적으로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시절이 어수선하여 중국 송나라 때 충장(忠壯) 이었던 악비에 관한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자신보다는 임금과 백성을 먼저 생각하고 그들의 안위를 자신의 안위보다 더 생각하는 ’장수와 충신' 들을 임금은 과연 좋아했을까!
손자병법에 있는 말로 ’전쟁 상황의 흐름상 필승이라 생각되면 임금이 싸우지 말라고 해도 싸워야 하며, 이기지 못한다고 판단되면 임금이 싸우라 해도 싸우지 말아야 한다. 즉 진격하는 것은 공명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고, 퇴각하더라도 문책을 회피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로지 백성을 보호하고 임금의 이익에 부합하는 장수이며 나라의 보배인 것이다.’
전장에서는 자기목숨 부지하기도 힘든 경우가 허다한데, 백성들과 임금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고 행동한, 중국 남송의 명장 악비(岳飛)가 있다.
악비는 병서를 열심히 탐독한 사람으로, 동경에서 군관을 지내면서 기병 1백여 명을 거느리고 훈련을 하고 있던 중, 갑자기 금나라 군이 나타나자, 놀란 병사들이 어찌할 줄 몰라 하자 침착하게 이렇게 말했다.
“당황하지 말라. 적들은 우리보다 많지만 우리 병력이 얼마인지 적들은 모른다. 놈들이 손을 쓰기 전에 우리가 먼저 손을 쓰면 이길 수 있다.” 그러고는 앞장서서 돌진해 적장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이에 고무된 병사들도 그를 따라 용맹하게 돌격했고, 적들은 숱한 사상자만 내고 황급히 도망쳤다.
또한 악비는 규율을 엄격하게 적용했는데, 한번은 병사가 백성의 삼 껍질 한 묶음으로 나뭇단 묶는 것을 보고 그 병사를 군법에 의해 처단함을 계기로, 백성들의 집에 들어 숙영을 하지 않고, 길가에서 노숙했으며, 백성들이 청해도 누구 하나 집에 들어가는 병사가 없었으며, 비록 얼어 죽더라도 백성의 집 재목을 뜯어 불을 피우지 않으며, 굶어 죽더라도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지는 않는다는 악비군의 규율을 철저하게 지켰던 것이다.또 악비는 싸우기 전에 항상 장수들과 작전을 의논 하고, 결정을 내린 다음 싸움을 시작했기 때문에 매번 이겼으므로 금나라군은 악비 군을 ‘태산을 무너뜨리기는 쉬워도, 악비의 군대를 무너뜨리기는 힘들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송을 멸망으로 이끈 세 사람
'정강의 변' 은 정강년(1126년)에 일어난 사건이란 뜻으로 중국 송나라 왕의 연호더.
당시 송나라는 가장 부자였지만, 지방군사력을 억제하는 정책을 펴 국방이 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송나라 휘종은 글, 그림, 음악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예술가지만, 정치보다는 도교에 빠져있었고, 조정은 간신과 무능한 신하들로 넘쳐났으며, 국방이 허술하여 요와 금나라 사이에서 시달리면서 경제적으로 부유했기 때문에 돈을 바치고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때 북쪽에는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강성했고, 한편으로 여진족의 ‘금나라'가 성장하고 있었는데, 송나라는 요나라의 횡포에 시달리다가 금나라를 이용할 '이이제이(以夷制夷)'를 계획하여, 금나라를 부추겨서 요를 치자고 했다.
송나라의 목적은 요나라에게 빼앗겼던 16주를 되찾고, 요나라에게 바치던 조공을 그만두는 것이었는데 지도부가 엉망이라 금과의 연합작전에서 송은 전혀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하자, 금나라는 요나라에게서 찾은 16주 중에서 6주 만 돌려주고 조공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송 휘종은 패해서 달아나는 요나라 왕 '천조제'에게 같이 금을 치자고 하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요나라 천조제가 금나라에 사로잡히면서 사실을 다 말해버렸다. 화가 난 금나라 '아골매' 는 군사를 동원해서 송나라 휘종을 공격하기에 이르렀고, 금나라 군이 수도에 근접하자 갑자기 아들에게 왕을 넘겨버리고 달아나자, 얼떨결에 왕이 된 흠종도 도망치려고 했지만 신하들이 막아서서 할 수 없이 남았다고 한다. 또 한사람 도사 곽경은 스스로 '육갑법'의 달인이라면서 도술로 금나라를 진압하겠다고 큰소리를 치자 휘종과 흠종은 그 말을 믿었으며, 길일의 생일을 가진 7777명의 ’신의 병사‘를 뽑아서 수도를 지키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1126년 금나라가 다시 쳐들어 왔을 때, 곽경은 전투도 길일을 골라서 해야 한다며 금나라 군이 수도까지 오도록 내버려두었고, 드디어 금의 병력이 수도를 포위하자, 흰옷 입은 7777명의 도술 병사들이 성문을 열고 나오자 순식간에 몰살당하고 만다.
그 결과 수도의 많은 백성들이 학살을 당했고, 흠종과 휘종은 사로 잡혀 많은 고관들과 함께 포로로 끌려갔지만, 곽경은 몰래 도망을 가버렸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악비가 휘종의 9남이자 흠종의 동생 조구(趙構)를 황제로 세우고 임안을 새 수도로 삼아, 남송 고종의 시대가 열렸지만 금나라를 상국으로 받들고 조공을 바치며 살아가게 되었다.
1140년 10월, 금나라는 또다시 화의 협정을 어기고, 전국의 정예부대가 을출을 총대장으로 하여 네 갈래로 송을 공격해 왔는데, 악비는 부장 왕귀, 우고, 양재흥으로 군사들을 통솔하여 적군의 남진을 막게 하는 한편, 하북 의병 대장 양흥에게 하동과 하북의 의병들로 적군의 후방을 기습하게 했다.
한편 악비는 언성에서 전투를 지휘했는데, 며칠 후 모두 승전보를 올리고 차례로 영창, 하남성 진주, 정주를 수복하면서 악비의 군대가 주선진에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접한 하북 의병들은 모두들 기뻐하며 황하를 건너 악비의 군대에 합류했다.
백성들은 수레로 식량을 운반해 왔고, 어떤 이는 향로를 이고 와 춤을 추며 환영했다고 한다.
그러니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한 음험한 자들에게는 악비가 미웠을 것이고, 특히 재상 진회는 금나라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풀려났지만,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애매하게 되자, 황제의 이익을 옹호하는데 앞장선다.
금나라 올출은 사자를 보내서 진회(秦檜)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밀서를 전했다. “그대는 영원한 화평을 주장하지만, 우리는 악비가 죽지 않으면 마음을 놓을 수가 없소. 영원한 화평을 원한다면 악비부터 죽여 없애시오.” 밀서를 받은 진회는 악비를 제거할 음모를 꾸몄는데, 우선 감찰어사 만사설을 부추겨 악비를 모함하는 상주서를 조정에 올렸다.
만사설은 악비가 오만 방자하며 금나라군이 회서로 진격할 때 싸우지 않고 관망만 하다가 결국 진지를 적에게 내주었다는 등 허다한 죄목을 날조했고, 진회에게 빌붙은 무리들이 너나없이 조정에 상주서를 올려 악비를 공격했다.악비는 진회의 음해를 모면하려고 추밀부사 직을 자진해서 내놓았지만, 진회는 악비의 상관이었던 장준과 결탁하는 한편 악비의 수하 장수인 왕귀, 왕준 등을 사주하여, 악비의 수하 장수 장헌이 악비를 도와 병권을 탈취하려고 병변을 일으켜 양양을 점령했다고 참소(讒訴)했다. 그리고 악비의 아들 악운 또한 장헌에게 편지를 써서 이 일을 획책한 바 있다고 참소했다. 악비와 악운이 대리사에 잡혀갔을 때, 장헌은 이미 모진 고문을 받아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만사설은 왕귀, 왕준 등의 고소장을 보이며 말했다.“조정에서는 너희에게 박대한 적이 없거늘, 어찌 배은망덕하게도 반역을 꾀한단 말이냐?”“반역이라니 당치 않소, 나는 나라에 미안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나라의 법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충신을 모함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이오.”악비는 당당하게 맞서며 대답했다.진회는 또 어사중승 하주(何鑄)를 보내어 악비를 심문했는데, 악비는 두말하지 않고 옷을 찢어 등을 보여주었다. 그의 등에는 ‘정충보국’(精忠報國)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를 보고 크게 감동한 하주는 더 이상 심문하지 않고 그를 옥으로 돌려보내고, 악비의 죄목서류를 읽어보고는 반역을 했다는 증거가 확실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고하자, 진회는 그를 다른 곳으로 따돌리고 다시 만사설에게 명해 악비의 죄목을 다시 만들게 했다고 한다.만사설은 악비를 잔인하게 고문하면서, 장헌에게 편지를 보내서 병권을 탈취하고 반역을 꾀한 것을 인정하라고 다그쳤지만, 물증인 편지가 없는 것은 악비가 불태워버렸기 때문이라고 억지를 썼다. 그렇게 억지 심문은 두 달 동안이나 계속되었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조정 대신들은 악비가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어떤 관원들은 보다 못해 상주서를 올려 악비를 변호하기도 했는데, 진회가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효력이 없었고, 오히려 해를 입기도 했다 한다.이에 분노한 노장 한세충이 진회를 찾아가, 악비가 반역을 했다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고 캐물었다. 진회는 어물거리다가 이렇게 대답했다.“글쎄요…'막수유(莫須有)' 악비가 장헌에게 보낸 편지는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그런 일이 꼭 없다고도 할 수 없지요.”그 말에 진노한 한세충은 진회를 꾸짖었다.“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확실한 증거도 없이 다만 있을 수도 있다, 그따위 구실로 사람을 반역죄로 몬단 말이오? 세상 사람들의 이목이 두렵지 않소?”1142년 1월의 어느 날 밤, 서른아홉 살에 불과한 민족 영웅 악비는 나라를 팔아먹은 간신들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때 악운과 장헌도 함께 살해되었다. 악비가 살해된 후, 임안의 옥졸 외순은 몰래 악비의 유골을 장사지내 주었고, 악비의 억울한 죽음은 고종이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사면이 되었다. 유골은 서호 옆에 있는 서하령에 안장되었으며, 묘소 동쪽에 악비를 기리는 사당인 ‘악묘(岳廟)’가 세워졌다.
그 후 진회는 병석에 있으면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아들 진희에게 재상직을 물려주고 싶었다.
고종은 진회를 찾아가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진회의 눈물을 닦아주며 짐짓 슬픔을 표했는데, 진회가 다음 재상이 누구냐고 문자 냉랭한 목소리로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그대가 물을 일이 아니잖소!" 권불 십년이라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진회의 집에 다녀온 날 밤 고종은 즉시 진회의 자손 3인을 해임한다는 조서를 썼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조당에 나가 조서를 발표하니 진회 일파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을 것이다.그날 밤 진회가 사망했고, 고종은 비로소 긴 한숨을 내쉬며 장화 속에 숨겨둔 단도를 꺼냈다. "이제 신발 속에 이것을 숨기지 않아도 되겠구나!"
'막수유(莫須有)' 즉 아마 있지 않을까? 하는 뜻으로 악비는 죽임을 당했고, 중국 항주의 악왕묘는 남송의 악비를 중국인들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으며, 항일 전쟁 시기에는 중국 사람들은 악비정신을 외쳤다고도 한다.
[대한행정신문] 기고- ’莫須有(막수유)’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청나라 건륭 연간(1736∼1795년)에 장원급제한 항저우 진간천은 악비의 무덤을 찾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사람들은 송나라 이후부터 회(檜)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했고, 나는 지금 그 무덤 앞에서 진(秦)이라는 성에 참담해 하는구나.’명장 악비가 항저우에서 아들과 함께 억울하게 처형당한 지 약 600년이 지나서 당시 악비를 모함하여 죽이는 데 앞장섰던 간신 진회(秦檜)의 후손이 지은 시와, 악비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역사의 간신 진회부부상을 보며, 수치심과 감정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참담한 심경을 글로 표현한 것이다.
‘역사는 공소시효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한때는 사람들이 진회 부부 모형을 침을 뱉고 발로차서 몇 번 부서지기도 했다고 한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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